세종이 선비가 훈고(訓詁)만 힘쓰는 경향을 지양하려고 처음으로 시행한 시부(詩賦) 진사시의 초시와 복시에 잇달아 장원을 하고 생원시에도 합격하였으며, 성균관에서 이른바 삼김(三金)의 한 사람으로 경학에 밝은 김반(金伴)에게 성리학을 배워 한글 창제의 협찬에 활용한 것이다.(3) 이듬해에는
신숙주․권남의 편에 서서 현실적인 노선을 택한 이후 순탄한 벼슬살이를 계속하게 된다. 김성우, 『15세기 중․후반 勳舊官僚 徐居正의 관직생활과 그에 대한 평가』, 대구사학회, 2006
그는 48세부터 예문관 대제학을 겸직하였는데, 이때부터 죽기 전까지 23년간 문형(文衡)의 자리에 있었다.
신숙주․권남의 편에 서서 현실적인 노선을 택한 이후 순탄한 벼슬살이를 계속하게 된다.
그는 48세부터 예문관 대제학을 겸직하였는데, 이때부터 죽기 전까지 23년간 문형의 자리에 있었다. 이에 나라의 전책과 사명이 모두 그의 손에서 쥐어지게 되었으며, 주요 관찬서도 그의 주도 아래 이루어
업적별로 나누어 파악했으며, 그것들을 통해 의의와 시사점, 한계점을 찾아내었다. 그리고 결론에 앞서 한 가지 덧붙여 세종과의 리더십을 비교해보는 연구도 시행했다.
본론을 시작하면서 정조의 생애부터 살펴보자
-본론-
1. 정조의 생애
조선 제22대 임금으로 이름은 산(祘), 자는 형
1.한국인은 단일 혈통이 아니다.
우리민족의 원류가 북방계와 남방계로 이뤄져 있다는 것은 학계가 다 잘 알고 있는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단일 민족을 내세우고 있는 것은 기이한 일이다. 민족의 동질성과 민족적 역량을 결집시키기 위해 나온 얘기이지만 이는 역사를 바로 보는 길이 아닌 것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