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명희(1888 - 1968)였기 때문이다. 여덟 살 연상(年上)인 살천스럽던 단재(1880 - 1936)가5) '제(弟)'라는 겸양(謙讓)을 표한 것도 벽초의 인간 됨됨이를 신뢰했기 때문이다. 이 글이 언제 쓰여졌는가는 편지 뒷부분이 유실(遺失)된 관계로 알 수 없지만 추정컨대, 홍명희가 검사국으로 넘어간 다음해라는 것은
민중을 새롭게 발견함으로써 극복하였다.
일반적으로 신채호에게 깊은 영향을 준 것으로 간주되는 크로포트킨은 경쟁도 진화의 중요한 요인이라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자본주의적 착취나 제국주의를 분쇄할 수 있는 사회진화의 방법은 경쟁이 아니라 상호부조에 입각한 민중의 직접 혁
사관이 극복되고 민중을 역사의 주체로 인식하려는 민중중심 사관이 나타남. ③고대사의 체계 인식이 더욱 풍부한 내용을 가지고 심화되고 체계화 되었으며 낭가사상이 주장되어 고대사의 무대가 확대 ․ 인식됨.
⇒ 신채호의 역사학이 완성된 시기이며 고대사 체계가 구체화 되고 낭가사상이 주
민족사학(民族史學)의 길을 열어나간다. 당시의 많은 역사가들은 우리 민족의 이념적 독립기반을 구축하기 위해 노력을 했다.
신채호/박은식의 등장과 관련 된 시대적(역사적) 배경
당시 조선은 일제의 식민사관에 의해 지배받고 있었다. 일제는 정체성론(停滯性論) 및 타율성론(他律性論)등의 논
낭설(浪說)이다. 1936년 벽초 홍명희는 <나는 24,5년 전에 중국 상해에서 단재를 처음 만났습니다>라고 써 둔 것으로 미루어 1911년 또는 1912년에 처음으로 만났음이 분명하다. 그들의 만남은 한국근대사의 중대한 사건이기까지 한데 벽초는 단재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회상(回想)을 남겨 놓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