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설(浪說)이다. 1936년 벽초 홍명희는 <나는 24,5년 전에 중국 상해에서 단재를 처음 만났습니다>라고 써 둔 것으로 미루어 1911년 또는 1912년에 처음으로 만났음이 분명하다. 그들의 만남은 한국근대사의 중대한 사건이기까지 한데 벽초는 단재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회상(回想)을 남겨 놓고 있다.
민족의식과 근대적인 민족주의를 성장시키는데 있어 근대적인 방법의 동원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말이다. 그렇다면 문화운동의 정의에서 '그 시기를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로 볼 것인가'가 문제가 되는데, 그것을 생각하기위해 문화운동의 의미를 생각해보면, 우리나라 독립운동사는 아무래도 일제의
사관에 대항하는 새로운 이론으로서 민족사관 이라는 틀이다.
본 연구의 당위성과 적실성은 다음과 같다. 첫째, 민족사관이라는 개념에 대해 근자의 부정적인 시각이 존재해 왔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사실 민족사관이라는 것이 자민족 내부적 입장에서 보면 민족의 단결력을 높이고 자긍심
민족국가를 구성하는 신국민이었다. 그러나 국권회복은 좌절되었고, 신채호는 국권회복이 어려워진 상황에서 정신적 국가 내지 국수를 강조해보기도 하지만, 신국민이 살아갈 장을 상실한 이상 그것은 곧 공허할 수밖에 없다. 형식적 국가가 없는 정신적 국가 상태에서는 신국민이 구체적 적극적으로
명희(1888 - 1968)였기 때문이다. 여덟 살 연상(年上)인 살천스럽던 단재(1880 - 1936)가5) '제(弟)'라는 겸양(謙讓)을 표한 것도 벽초의 인간 됨됨이를 신뢰했기 때문이다. 이 글이 언제 쓰여졌는가는 편지 뒷부분이 유실(遺失)된 관계로 알 수 없지만 추정컨대, 홍명희가 검사국으로 넘어간 다음해라는 것은 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