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사상이언적이 서신을 통해 조한보와 벌인 논쟁은 태극논쟁, 또는 무극태극논쟁이라고 불리운다. 이는 송나라 때 성리학의 기초를 닦는 염계 주돈이(廉係 周敦頤)의 「태극도설(太極圖說)」에 대한 이해의 차이에서 시작된 것이다. 이들의 논쟁은 중국의 주희와 육상신이 벌였던 논쟁의 연장선
회재의 비판에 따르면 망기당은 불교에 상당히 심취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회재의 비판은 망기당 개인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지만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의 방법, 수양 방법을 전면적으로 비판했다고도 볼 수 있겠다.
망기당과의 무극대극 논변이 조선유학사상 제일 먼저 있었던 주요한
구인록 求仁錄》(1550)
《대학장구보유 大學章句補遺》(1549)
《중용구경연의 中庸九經衍義》(1553)
《봉선잡의 奉先雜儀》(1550)
“세상의 근본은 임금에게 있고, 임금의 도는 마음에 있으며, 마음의 방법은 인의에 있다. 그 길은 지극히 가까워서 멀지 않으며, 그 방법은 지극히 간단해서 복잡하
사상의 변화 등의 정치·경제·사회·사상·문화 등의 여러 분야에서의 엄청난 변혁과 전환을 의미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문벌 귀족 중심의 사회이자 중세사회였던 고려사회에서 사대부 중심의 사회이자 근세사회였던 조선사회로 발전한 것이다. 여말선초의 시대적 배경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먼저
1. 중국유학의 연원과 전개
-고대 유교문화의 태동과 형성
유교문화는 고대 중국의 하․은․주 라는 삼대문화를 기반으로 형성되었다. 삼대문화 이전에도 요임금을 대표로 하는 당 왕조와 순임금을 대표로 하는 우 왕조가 존재했었다는 사실이 『서경書經』에 기록되어 있다. 요와 순은 고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