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사상가였다. 그는 국가를 부강시켜려면 청의 물질제도를 배워 생산기술과 도구를 개선하고, 국내상업과 외국무역을 장려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그의 개혁사상은 1781년 1월 22일에 올린 그의 「병오소회(丙午所懷)」와, 1799년에 농서로서 바친 「북학의 진소본」를 통하여
사회제도의 모순점과 그 개혁방안을 다루었다.
1779년에는 규장각의 초대 검서관(檢書官)으로 임명받아 13년간 규장각 내 외직으로 근무하였고, 1786년 왕명으로 당시 관리들의 시폐(時弊)를 시정 할 수 있는 구폐책(求弊策)을 올리게 하였는데, 그가 진언한 소(疏)는 주로 신분적인 차별타파와 상공업
실학적 문제의식과 사상적 요소들이 정리되어 실학파의 학파적 성립을 보게 된다. 성호 이익을 중심(大宗)으로 하고 권철신 · 이가환 · 안정복 등이 주축이 되어 제도개혁론을 주장하는 18세기 전반의 성호학파와 청나라의 문화와 청에 들어와 있는 서양의 선진 과학기술을 적극 받아들이자는 담헌 홍
사람들이었으며, 서울 및 근기 지방 출신의 학자들로 주축을 삼고 있다. 이들은 위로는 벌열층에 결탁해서 출세를 꾀할 수도 있었고, 아래로는 농․공․상의 서민층에 가까이 해서 민중의 이익을 옹호할 수도 있었으나 모두 후자를 택하였다.
1.2. 남인과 서인 실학자
1.2.1. 남인 실학자
북학의>(北學議)이다. 북학이란 북쪽의 학문, 그러니까 청나라의 학문을 뜻하며, 의(議)는 논의한다, 거론한다 정도의 의미를 지닌다. 결국 `청나라에서 새롭게 접한 학문에 대하여 논의하는 책` 정도의 의미를 지니는 셈이다.
여기에서 `북학`이라는 말의 출전은 <맹자>(孟子) 등문공상의 제4단락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