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건제가 그 사회의 근대화, 산업화 발전 원동력이 되어 봉건제가 없는 사회는 이러한 과정이 없어 발전하지 못했다고 설명한다. 이러한 서구, 일본 역사학에 대해서 반발하기 위해 중국, 한국에도 봉건시대가 존재했음을 보이는 것이 전략적으로 중요하게 되었다.
서양의 봉건제는 정치적으로는 지
적 진실에 접근하는 최선의 방법으로 과학이 이용됨은 물론이다. 그러다 보니 역사학과 과학이 대등한 입장에 있으면서도 인간의식의 역사를 과학의 일부로 착각, 비하하는 경우도 나타나게 되었다. 과학이란, 자연과학은 물론 사회과학이라 불리는 학문분야들까지도, 인간이나 인간집단의 행위에 대
바가 없었다. 조선역사가 출간된 바로 이듬해, 당시 일본에서 좌익활동에 종사하고 있던 이북만은 칼 마르크스의 소위 ‘아시아적 생산양식’을 봉건제도의 동양적 형태라고 간주하는 입장에서 통일신라시대 이후를 봉건제사회로 규정하는 논문을 일본의 역사과학(1~4)에 발표했다. 당시 유물사관은
1. 일제하 사회주의 사상의 확립과 학문관
(1) 백남운의 사회주의 사상 수용
유학적인 분위기 속에서 성장한 백남운이 사회주의 사상을 수용한 것은 일본 동경상과대학 예과시기의 사상적·학문적 편력과정을 거치고 1922년 본과에 진학하여 자신의 실천 과제를 구체화시키면서였다. 당시 조선에서는
적한국사관’을 흔히 ‘식민사관’이라고들 부른다. 그러나 이는 정확한 용어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식민사관’이라 하면 우선 식민을 하는 쪽이 주체인지, 식민을 당하는 쪽이 주체인지 애매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사관이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범세계적으로 일어났던 하나의 역사적 현상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