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학궤범》에 채집되어 실렸는데 고려시대로부터 조선을 통해 묘정(廟庭)에서 〈아박〉(牙拍)과 함께 불렸다.
지은이와 지은 때는 미상이고, 내용은 일년 열두달의 자연 정경에 비기어 남녀간의 애정을 읊은 것인데, 조선 중종 때 〈정읍사〉와 함께 음사라 하여 폐지되고 신제악장(新制樂章)과 대치
대략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훈민정음 창제는 진정한 의미에서 의 국문학의 출발을 가져왔으며, 문자 생활의 일대 변혁을 가져왔다.
둘째, 형식면에서는 운문 문학이 주류를 이루어 시조, 악장, 경기체가, 가사 등이 지어졌고, 내용면에서는 유교적인 이념과 상류 사회의 생활이 중심이 되
악학궤범(樂學軌範)》,《악장가사(樂章歌詞)》,《시용향악보(時用鄕樂譜)》등에 문자화되어 전해지게 되었다. 따라서 고려속요는 관련 자료도 드물고 가사도 후대에 정탁이 된 까닭에 본래의 모습을 상고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따른다. 이런 상황이기 때문에 논자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나올 수밖에 없
가사집을 참고하여 고려사악보를 만들었고, 향찰로 적혀 있었을 노 랫말을 훈민정음으로 옮겨 놓음으로써 오늘날의『악장가사』,『시용학악보』,『악학궤범』에 실린 고려가요를 전하게 되었던 것이다. 고려속요의 노랫말이 조선에 들어와 악장으로 불리는 것은 고려에서 널리 불린 것 가운
해당되는 중요문헌으로는 『고려사(高麗史)』,『악학궤범(樂學軌範)』,『악장가사(樂章歌詞)』,『시용향악보(時用鄕樂譜)』등을 들 수 있다.
먼저, 『악학궤범』의 「시용향악정재」에서는 고려 때부터 연행된 궁중속악으로 <동동>․<정읍사>․<처용가>․<삼진작>의 네 편을 찾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