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안축은 원나라에서 요양로 개주판관에 임명된 상태였다. 하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충숙왕에게 충애를 받아 고려의 벼슬을 받고 귀국했다. 왕명으로 여러 벼슬을 거친 후 강원도 조무사로 파견되었는데, 이때 『關東瓦注』라는 문집을 남겼다. 후에 파면 당하나 다시 복직 후 이제현 등과 『編年綱
창작배경>
- 1330년 안축(安軸 1287 ~ 1348)이 지은 경기체가
- <근재집> 권2에 전함
- 작자가 44세 때 강원도 존무사로 있다가 돌아오는 길에 관동지방의 뛰어난 경치와 유적 및 명산물에 감흥하여 짓게 됨
- 관동별곡과 관동와주에 실린 한시들 간의 괴리가 생김
: 당시대의 현실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
안축(安軸)이 지은 《관동별곡(關東別曲)》 《죽계별곡(竹溪別曲)》 등이 있으며, 조선시대의 것으로는 권근(權近)의 《상대별곡(霜臺別曲)》, 변계량(卞季良)의 《화산별곡(華山別曲)》, 정극인(丁克仁)의 《불우헌곡(不憂軒曲)》과 작자 미상의 《오륜가(五倫歌)》 《유림가(儒林歌)》 《연형제곡(宴
1. 머리말
사대부는 고려 무신 집권기에 신진사인으로서 정치의 중앙에 진출하여 훗날 조선 건국의 주체가 된 이들을 말한다. 윤재민,「고려후기 사대부의 등장과 현실주의적 한시 경향」, 『민족문학사 강좌 上』, 민족문학사연구소, 1995, pp115~116
즉 고려 후기 사대부는 어느 특정 시점에 즉흥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