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안축은 원나라에서 요양로 개주판관에 임명된 상태였다. 하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충숙왕에게 충애를 받아 고려의 벼슬을 받고 귀국했다. 왕명으로 여러 벼슬을 거친 후 강원도 조무사로 파견되었는데, 이때 『關東瓦注』라는 문집을 남겼다. 후에 파면 당하나 다시 복직 후 이제현 등과 『編年綱
1. 硏究史 정리
경기체가는 고려 고종 때의 「한림별곡」을 효시로 조선조 말인 1860년 민규의 「충효가」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명맥을 유지했던 국문학의 시가 장르다. 경기체가는 26수에 지나지 않아 수적으로는 비록 적으나, 그것의 문학사적 가치는 우리 시가사에서 결코 도외시할 수 없는 영역이
1. 서론
1.1 경기체가 일반론
경기체가는 고려 고종 때의 「한림별곡」을 효시로 그 형식을 전형으로 삼아 조선조 말인 1860년 민규의 「충효가」에 이르기까지 명맥을 유지했던 국문학의 시가 장르이다. 경기체가를 ‘경기하여가’, ‘경기별곡’ 등으로 부르자는 견해도 있지만, 많은 작품이 ‘景
1. 명칭과 범위
일반적으로 고려 시대의 시가를 범칭할 때에 고려가사, 고려가요 또는 고려 장가라는 이름으로 불러왔다. 그리고 『한림별곡』『관동별곡』『죽계별곡』 따위의 한문계 시가들을 경기체가, 경기하여체가 또는 별곡체라 불러 왔고『청산별곡』『서경별곡』『만전춘』『정석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