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선조시기
누르하치는 선조 22년인 1589년에 건주삼위 전체를 통일하였으며, 1591년에는 두만강 유역의 여진인 일부를 복속시켰다. 이때 조선의 번호였던 여진인의 상당수가 건주여진에 속하게 되었다.
임진왜란 중, 건주위 여진인들이 산삼을 캐러 조선의 영내에 들어왔다가 죽는 사건이 생겼다. 이때
여진인으로 하여금 그들을 회유케 하여 변방 지역의 안정을 꾀하기도 했다.
3. 문화정책
- 문신의 사가독서를 다시 실시하여 학문의 질을 높이고, 조정의 학문 풍토를 새롭게 했다
- 연회나 강연 등에서 시를 지어 시 문학에 기여를 했다.
4. 편찬사업
- 국조보감은 조선 전기의 역대 왕들 중에서 모범이
여진인들이 살던 지역은 텅 비게 되었다. 통일 초기에 청나라 통치 계층은 이 지역의 개발을 돌아볼 틈이 없었지만, 충분한 논의를 거친 다음 1677년에 강희제(康熙帝)는 명령을 내려 백두산과 압록강 두만강 이북의 수천리 지역을 금지구역으로 정하고, 이 지역 안에서 작물 재배, 인삼 진주 채취, 벌목
여진인으로, 육진에 출입하며 조정으로부터 관록과 여러 가지 후대를 받아온 자이다. 선조 16년(1583) 경원부(慶源府)에 사는 오랑캐들이 여러 가지 말을 퍼뜨려 민심을 선동해 난을 일으키자 반기를 들고 이에 호응해 난을 일으켰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탕개의 난,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
여진인(女眞人)•달달인(達達人)•고려인(高麗人)을 그대로 요동(遼東)에 소속시켜야 된다.” 라고 주장하며 철령위(鐵嶺衛)를 설치하여 옛날 원의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 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행사하려 하였다. 그것이 원인이 되어 우왕과 최영을 중심으로 요동정벌설을 주장하게 되었고,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