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군칙(禹君則)과 난을 논의한 뒤로 10년 동안 각지를 다니며 향촌의 유력자, 무술을 갖춘 장사, 그리고 부호를 끌어들여 봉기를 준비하였다. 평서대원수의 직책을 띠고 1811년 12월 18일 가산 다복동의 봉기로부터 만 4개월 동안 계속된 반란을 총지휘하였다. 1812년 4월 19일 관군에 의해 정주성이 함락될
우군칙, 후군장 윤후검이 주도하였고 북진군의 지휘부는 부원수 김사용, 선봉장 이제초, 모사 김창시 등으로 구성 되었다. 그리고 이희저는 남북진군의 군량을 담당하기로 하였다.
홍경래가 이끈 남진군은 12월 19일 새벽 3시경에 가산 삼교에 이르렀고 곧 가산을 점령하였다. 그리고 관아의 무기를 확
우군칙과 김창시, 홍총각 등이었다. 이들 뿐만 아니라 평안도 지역의 많은 백성들이 홍경래의 뜻을 따랐다. 홍경래와 그 무리들은 무려 10년 동안이나 치밀하게 난을 준비했다. 그리고 1811년 12월 18일 드디어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홍경래가 이끄는 군은 열흘 만에 곽산, 정주, 선천 등을 점령했다. 그러
Ⅰ. 서론
21세기 탈냉전과 세계화 시대에도 한국과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 각국의역사와 영토문제를 둘러싼 갈등과 분쟁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 영토와 역사문제를 둘러싼 역내 대결 양상은 개별국들이 전쟁과 무력충돌의 가능성을 공개적으로 언급할 만큼 격화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한·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