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협동전선에 대해 공개적인 공감을 표명한 것은 1925년 1월부터였고 사회주의계는 1923년 이후 신간회가 창립될 때까지 민족협동전선론을 논의하였으며 그에 따른 조직적 결집을 실천하였다.
3) 조선민흥회
1926년 7월 8일 서울청년회와 조선물산장려회가 중심이 되어 발기한 민족 협동전선단체이
. 1942년 11월 13일 개최된 화북조선독립동맹 晉西北 분맹 결성식장에도 김구의 사진이 손중산.장개석.모택동.카타야마 센(片山潛)의 사진과 함께 걸렸다. 이는 독립동맹이 임정 주석 김구를 민족해방운동의 대표적 지도자로 인정하고, 임정을 민족통일전선 결성의 주요 동맹자로 설정했음을 반증한다.
운동 역량의 결집을 위하여 통일전선 형성에 주력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3.1운동과 더불어 7개의 임시정부가 수립된 것을 하나의 정부로 통합했던 것도 의의가 컸지만, 그 후 통합과 분산은 임시정부 주변에 항상적 문제로 제기되었다. 1923년의 국민대표회, 1926년부터의 민족유일당운동, 1930년 우파 통
민족운동가들은 1920년대 국민대표회의와 민족유일당운동을 통해 민족운동의 방략에 관한 새로운 모색을 도모했다. 또한 임시정부가 수립된 이후에도 국외 민족운동세력들은 독립운동단체를 조직하여 다양한 조직이념 및 활동을 전개했으며, 임시정부 중심의 활동이 한계에 직면했을 때, 민족운동의
단체의 대소.은현을 막론하고 규합 통일하여 유일무이한 최고기관을 조직할 것”을 제의하고 있다. 이는 운동의 발전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1차 세계대전에서의 연합국측의 승리와 독립을 향한 약소민족들의 독립운동이 확산되는 국제정세에 의해 고무된 것이다. 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