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클리프(JohnWycliffe)와 존 후스(John Huss)같은 이들은 교회생활 뿐만이 아니라 교화가 지켜온 교리자체의 개혁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또 어떤 자들은 가난하고 짓밟힌 자들에게서 특히 성행하였던 종말론적 기대감에 부응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다양했던 개혁운동을 본 논고에서 다루기
이탈리아에서 발생한 르네상스의 특징이 그리스, 로마의 고전부활에 있고, 서부유럽 르네상스의 특징이 군주체제 부활에 있다고 한다면, 독일 르네상스의 특징은 종교적인 것으로 원시 기독교로의 복귀를 지향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16세기에 시작에서 17세기 초 절대주의 시대의 개막까지 지속된
Ⅰ. 서론
인간 정신에 있어서 종교의 자리가 어디에 있느냐 하는 문제를 살필 때 몇 가지 그릇된 견해들이 있다. 어떤 사람은 종교를 지식의 일종으로 생각하여 지성(知性; intellect)에 종교의 자리를 둔다. 또 어떤 사람은 종교를 하나님에 대한 일종의 직접적인 느낌으로 간주하여 감정(感情; feelings)에
John Frith)에 의해 패트릭의 처소들(Patrick’s Places)로 번역되었다. 그는 루터를 직접 방문하기도 했다. 패트릭 해밀턴은 종교 개혁의 열정에 충일하여 순교를 각오하고 스코틀랜드로 다시 귀국하여 설교하기 시작했다. 킨카벨(Kincavel)에서 세인트앤드루스로 오라는 비튼의 출두 명령을 받고 그곳에 가자마
자에게 약속을 지킬 의무가 없다”며 안전보장을 취소할 것을 강권하고 후스를 투옥시켰다. 투옥된 지 3개월 후 비로소 추기경 다이이(Pierre d'Ailly)를 위원장으로 하는 위원회의 첫 심리가 열렸다. 공의회는 이단자로 처형된 위클리프와 후스 사상과의 관련성을 조사한다는 명분으로 후스를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