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활동
30세 때 파리에서 디드로를 만나 <<앙시클로페디>>를 중심으로 모인 지식인 집단 '철학자들'에서 중심역할을 하고 오페라 <<마을의 점쟁이>>를 작곡하여 왕과 왕실로부터 인정받기도 했다. 37세 때 반종교성향의 글로 구속된 디드로를 만나기 위해 뱅센으로 가는 도중 디종 아카데미 현상 모집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반면에 고산은 강화도에서 뱃머리를 돌렸을 당시에 조선의 항복 소식을 듣고도 남한산성에 있는 인조를 알현하지 않고 돌아갔다는 이유로 서인들로부터 계속해서 시비의 대상이 된다. 뿐만 아니라, 이 사건이 죄가 되어 2년 후인 1638년에는 1년간 경상북도 영덕으로 유배를 가게
쓰여졌다는 점에서 평민들에게도 널리 읽힐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주었다.
3. 한글에 대한 사랑- 김만중은 한글을 사랑하는 작가였기에 <구운몽>을 한글로도 지었다. 그 결과 이 작품은 김만중의 어머니와 같이 여성들도 읽을 수 있었다. 주재우(2007), 『구운몽』, 계림, pp.103-105.
Ⅱ. 작품 분석
유배를 가게 되었다.(이것이 유명한 병진소임이다).그로부터 1년 뒤에는 경상남도 기장으로 이배되었고, 인조반정(1623)이 일어나 이이첨 일파가 처형되기까지 8년 동안 유배생활을 하였다.
유배가 풀린 후에 의금부도사로 임명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해남으로 내려와 지냈다. 42세 되던 인조6년(1628)에
속미인곡과 더불어 가사문학의 극치를 이룬다는 것과 『정과정』과 염원을 같이 하는 연군지사(戀君之詞)라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작품의 배경을 보면 선조 18년(1585) 송강이 50세가 되던 해 8월에 사간원과 사헌부의 논척을 받고 관직에서 물러나 전남 창평에서 4년간 우거할 시기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