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산 윤선도 선생의 삶과 작품

 1  고산 윤선도 선생의 삶과 작품-1
 2  고산 윤선도 선생의 삶과 작품-2
 3  고산 윤선도 선생의 삶과 작품-3
 4  고산 윤선도 선생의 삶과 작품-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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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고산 윤선도 선생의 삶과 작품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1. 고산 윤선도 선생의 삷의 자취
(1) 고산 윤선도 선생의 자(字), 호(號), 시호(諡號)의 유래

① 자(字)의 유래

② 호(號)의 유래 - 고산(孤山)

③ 호(號)의 유래 - 해옹(海翁)

④ 시호(諡號)의 유래

(2) 고산 윤선도 선생의 삶의 발자취

(3) 고산 윤선도 선생의 우정

① 이해창(李海昌 : 1599 ~ 1651 )

② 홍무적(洪茂績 : 1577 ~ 1656)

③ 하홍도(河弘度 : 1593 ~ 1666)

④ 조경(趙絅 : 1586 ~ 1669)

⑤ 이경여(李敬輿 : 1585 ∼ 1657)

⑥ 권해(權海)

⑦ 정길보(鄭吉甫)

⑧ 나위소(羅緯素, 1583 ~ 1667)

(4) 고산 윤선도 선생의 흔적들.
① 녹우당

② 윤선도 유물관

③ 금쇄동

④ 보길도

2. 고산 윤선도 선생의 작품의 향기

(1) 고산 윤선도 선생의 시조 작품
고산 선생이 남기신 시조 작품집인 시본은 대별하여 사본(寫本)과 판본(板本) 양종으로 나
① 육필본(肉筆本), 전사본(轉寫本)
(a) 산중신곡(山中新曲)

(b) 금쇄동집고(金鎖洞集古)

(c) 금쇄동기(金鎖洞記)

(d) 어부사(漁父詞)

② 판본(板本) - 초간본, 재간본
(a) 고산유고(孤山遺稿)

(b) 고산가사(孤山歌辭)

(c) 고산년보(孤山年譜)

(2) 고산 윤선도 선생의 한시(漢詩)

(3) 고산 윤선도 선생의 한시(漢詩)와 시조(時調)와의 관련성

① 사친적(思親的) 측면

② 憂時戀君的(우시연군적) 측면

③ 忠孝葛藤的(충효갈등적) 측면

④ 자연관적(紫煙觀的) 측면

⑤ 音樂的(음악적) 측면

3. 고산 윤선도 선생의 작품을 살펴보며..

4. 고산 윤선도 선생의 삶과 작품에 대한 보고서를 마치며..

< 참고 자료 >

본문내용
(2) 고산 윤선도 선생의 삶의 발자취
윤선도는 선조20년(1587년)에 태어나 광해군, 인조, 효종대를 거치고 현종12년(1671)에 돌아가셨다.
이 시기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같은 유래 없는 변란이 있었고 정치적으로는 당쟁이 심해지는 가운데 서인이 득세한 시기였다. 그의 집안은 대를 이어 벼슬을 한 명문이었고 재산도 유족했지만 남인의 집이었다. 이 때문에 자신의 견해를 굽히지 않고 따지고 들어서 때로는 도량이 좁다는 말을 듣기도 했던 자신의 꼬장꼬장한 성격 때문에 윤선도의 삶은 평탄하지 못했다. 85세로 장수를 누렸으나 세 차례에 걸친 유배로 20년 남짓한 세월을 보냈고 그사이에 해남의 금쇄동과 보길도 부용동 등에서 19년가량을 숨어서 살았다. 그러나 그의 은거는 골짜기에서 고사리를 캐는 생활은 아니었다. 그는 집안의 재력으로 화려하다고 할 정도의 은거생활을 하였고, 그 가운데서 유명한 어부사시사, 오우가, 산중신곡, 몽천요 등 그 자신을 우리나라 시가문학의 거성으로 자리매김 하게한 작품들을 남겼다.
윤고산 선생은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어렸을 때 후사가 없던 해남윤씨 종가에 입양되어 해남으로 내려와 살았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여, 아버지 이외에는 특별히 스승도 없었으나 경사백가(經史百家)를 두루 읽고 의학, 복서(卜筮), 음양, 지리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독서하여 교양을 쌓았다. 특히 소학을 가까이 하여 처신과 공부의 지침으로 삼았다.
진사시에 합격한 후 성균관 유생으로서 공부하던 30세(광해군8년1616)때 윤선도는 이이첨, 박승종, 유희분 등은 당시 집권세력의 좌상을 격렬히 규탄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오히려 모함을 받아 함경도 경원으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이것이 유명한 병진소임이다).그로부터 1년 뒤에는 경상남도 기장으로 이배되었고, 인조반정(1623)이 일어나 이이첨 일파가 처형되기까지 8년 동안 유배생활을 하였다.
유배가 풀린 후에 의금부도사로 임명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해남으로 내려와 지냈다. 42세 되던 인조6년(1628)에 별시문과초시에 장원으로 합격한 후 송시열과 함께 봉림대군, 인평대군의 사부로 임명되었고, 사부는 관직을 겸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왕의 총애에 힘입어 공조좌랑, 형조좌랑, 한성부 서윤 등을 5년간 역임했다.
그 후 예조정랑, 사헌부 지평 등을 지냈으나 48세 되던 해에 반대파의 모함을 받아 성산 현감으로 좌천되었다가 이듬해에 파직, 해남으로 내려왔다. 이 무렵부터 그는 당쟁으로 번잡한 세상을 멀리하고 숨어살 뜻을 가졌다고한다.
51세 되던 인조15년(1637)에 왕이 청나라에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통분하여 세상을 멀리하고자 제주도로 향하던 도중에 보길도를 발견, 그 빼어난 산수에 매혹되어 그곳에 자리 잡고 부용동 정원을 꾸미기 시작했다. 이듬해에 난이 평정된 뒤에도 그동안 고초를 격은 왕에게 문안드리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다시 경상북도 영덕으로 유배되었지만 1년 만에 풀렸다.
이후 10년 동안 윤선도는 보길도 부용동과 새로 발견한 해남의 금쇄동을 오가며 자연에 묻혀 지냈다. 이때 금쇄동에서 소박한 산중생활과 한가한 정서를 읊은 것이“산중신곡”, “속 산중신곡“들이었고,65세(효종2,1651)에 보길도의 춘하추동을 배경으로 지은 것이 ”어부사시사“이다. 금쇄동과 보길도 부용동은 윤선도 시가문학의 2대 산실이 된 것이다.
효종이 즉위한 후 봉림대군 시절의 사부였던 윤선도를 불러 동부승지, 예조참의 등의 관
참고문헌
< 참고 자료 >
* 참고 문헌



(인물 시조선) 고시조 산책
성낙은 作/국학자료원 發
문학의 향기를 찾아서
정병헌, 이지영 作/돌베게 發
고산문학평론
문영오 作/ 태학사 發

* 참고 웹 사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