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리학이 본격적으로 이론적 탐구형태를 취하여 전개된 것은 16세기에 이르러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 이론 탐구의 중심인물은 이황과 이이였으며 그들의 주된 탐구 내용은 우주생성에 관한 태극론(太極論)과 인간내면에 관한 심성론(心性論)을 이기론적(理氣論的)으로 설명하려 한 것이라고 할
성리학적인 대의를 지켜 신왕조에 협조 하지 않은 선비들은 자연히 관사(官史)가 될 기회가 없었으므로, 시골에서 글 읽고 자녀들을 가르치는 일을 업으로 삼았다. 그것이 성종의 부름을 받고 중앙관계에 진출하기 이전 사림의 모습이었다.
초기 사림파가 『소학(小學)』을 중시했다는 사실이 말해 주
인간의 순수한 본성을 바탕으로 한 인격의 수양과 실천을 강조하였다. 이 때문에 주자학을 성리학(性理學)이라고도 한다.
한편, 유학에서는 인격적으로 완성된 사람을 군자나 성인(聖人)이라고 하는데, 성리학은 이와 같은 성인이 되는 것을 학문의 목표로 삼고 있기 때문에 성학(聖學)이라고도 한다.
성리학에 전념하였다. 22세에 성주목사 노경린(盧慶麟)의 딸과 혼인하고, 다음해 예안의 도산(陶山)으로 이황(李滉)을 방문하였다. 그해 별시에서 <천도책(天道策)>을 지어 장원하고, 이 때부터 29세에 응시한 문과 전시(殿試)에 이르기까지 아홉 차례의 과거에 모두 장원하여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
성리학을 정립하는데 있어서도 퇴계처럼 정주를 모방하지 않았고, 또 퇴계처럼 불교나 노자를 무조건 이단시하지도 않았다.
학문을 하는데 있어서 그는 주체적 정신과 창조적 의지를 가지고 다른 학문의 이념을 연구한 뒤에 취사선택하고 그것을 자신의 철학과 생활의 이념으로 삼았다.이황과 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