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자』의 영향
최근 연구로 미루어보아 연암의 열하일기(熱河日記)는 상당한 부분에서 『장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나타난다. 때문에 연암(燕巖)과 『장자』를 연관 지어 생각해볼 수 있는데 장자에 대한 연암의 관심을 도강록(渡江錄)에서 먼저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관심의 바탕에는 당
열하일기』에 나타난 산문 시학: <환희기>의 담론 구성 방식을 중심으로」, 『국어국문학』, 국어국문학회, 2006.
연암 박지원은 본래 가지고 있는 특성에다 시대적인 상황이나 작자의 개성에 따라 논술, 의론을 덧붙여 기의 특성을 다양하게 하여 변화된 요인을 적극적으로 이용하였다. 이것은 특
연암 스스로 말했던 것처럼 화·현벌의 최상층 귀족계급에 속해 있었던 자신의 계급성과 그의 창작에 담긴 개혁 담론의 급진성이 양립할 수 없는 간극을 노정하고 있다는 사실은 주자주의에 대한 그의 양면가치적 관심관계를 추정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의식 활동의 측면에서는 철저히 주자주의의
연암으로 불려진 것도 이에 연유한다.년후 홍국영이 물러나자 가족과 함께 서울로 돌아와 있다가 그 해(1780- 정조4년)에 삼종형 박명원의 권유로 청나라 사절로 북경에 갈 때 최말단의 신분으로 함께 가게 되었다. 그리고 압록강을 거쳐 북경, 열하를 여행하여 다녀온 후 열하일기라는 한국 문학사에 길
열하에서 피서를 즐기는 바람에 열하까지 가는 행운을 누리게 되었다. 연행을 통한 깨달음의 기행 경험을 수년간 정리하여 귀국 후에 연암 골짜기에 들어가 머물면서『열하일기』25편을 저술했다. 이 작품은 랴오둥[遼東]·러허[熱河]·베이징[北京] 등지를 지나는 동안 특히 이용후생(利用厚生)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