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를 포기하고 셋째형 서와 종형 진의 문하에서 가학을 배웠다. 과거를 포기한 후 이익은 청나라에서 들여온 새로운 학문을 하거나 전국의 명승고적과 자연을 떠돌며 글을 짓는기도 하고 저술활동과 제자를 받아들여 후학을 가르치거나 스스로 농사일을 하는 등의 여러 가지 활동을 하였다. 영조 3년
과거를 포기하게 되면서(아버지,형의 영향) 이익의 주류적 학문보다는 보다 폭넓은 학문을 하게 되었다. 학파가 다른 이이에 대해서도 공부하며 율곡학파의 시무적인 면을 인정하였고 이황에 대해서도 비판을 가하였다. 또한 부친 때부터 있었던 청학에 대한 서적을 통해 당시의 새로운 학문을 접할 수
제도의 확립과 과거제도 폐지라고 할 수 있다. 유형원의 교육개혁론은 모든 사람(民)에게 교육을 시켜야 한다는 생각으로 방법적으로는 단계적인 교육을 시켜야 하고, 또 그 교육을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는 근대적인 사상이다. 이 사상은 원래 개방적이고 공정했던 과거제도가 왕권과 밀접한 관계를 맺
당시의 정국운영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1706년 세자(훗날의 경종)를 보호해야한다는 내용의 상소를 올렸다가 국왕 숙종의 분노를 사서 장살(杖殺)당하게 된다. 이잠이 죽기 1년 전에 과거에 응시했다가 낙방했었던 이익은 이 사건에 큰 충격을 받아서 과거 공부를 그만두고 학문에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