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편 및 마약의 생산·공급지로서의 역할도 있었다. 이 때문에 조선은 국내적으로 마약이 남용되어 사회문제를 낳기도 했다. 이러한 문제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일본의 아편정책 연구에서 식민지 조선관계는 그 연구 정도가 미미했다. 그 주된 이유는 일본의 아편정책에 관한 연구가 주로
시행한 청조의 적극적인 노력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청국 대신 이홍장의 조선에 대한 청국의 종주권 주장은 미국의 반대에 부딪쳤을 뿐 아니라 ,병자수호조규 이래 청일전쟁까지 시종일관 조선과 청의 조공관계를 단절하려는 일본의 팽창주의적 대륙정책과도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그
아편전쟁의 충격: 1840년 아편전쟁의 충격이 일본에 전해짐. 당시 중일 교역은 私貿易이었으므로 정보도 그만큼 빨리 전해짐. 불과 몇달 후 일본에 위기감 고조.
-네덜란드 왕이 막부의 장군에게 친서를 보내 개항을 권고함.
→幕府의 지도층, 큰 藩의 大名은 서양세력에 문호를 개방해야 한다는
1913-일본의 조선미이입세 철폐
2. 제2기(1920-1931년)
1920년의 반동공황, 1927년의 금융공황과 중국의 일화배척운동이 겹치며 외국무역이 부진. 특히 대공황. 조선경제도 대체적으로 불황기. 그러나 1920년의 회사령폐지, 구관세거치기간 만료로 인한 관세법·관세정률법 등의 시행으로 경제제도가 일신.
일본이었다. 그런데 청은 쇠퇴하고 자국마저 큰 위기에 처해있었기 때문에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할 수 없었고 미국과 영국은 조선의 영토에 그리 큰 욕심을 내지 않았다. 이들 국가에게 조선은 교역만 할 수 있다면 굳이 점령할 필요가 없는 국가였다. 러시아는 조선보다는 만주를 획득하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