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 있어서는 일본이 처한 국내외적 조건들 속에서 국가목표의 달성을 위해 국가자원을 어떤 방식으로 얼마나 사용할 것인가를 놓고 주요 정치세력들 사이에 지속적인 논쟁과 대립이 있어왔다. 이러한 외교노선 논쟁은 국제주의외교이념과 아시아주의 외교이념을 둘러싼 경쟁과 대립으로 나타났
대한 비판은 김일성에 대한 비판으로도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1961년에 ‘우호협력 및 상호원조조약’(중조우호협력호조조약)을 맺어 정치, 경제, 군사, 문화 등 전반 분야의 우호∙협력관계로 발전하게 되었다. 중국과 북한은 이를 통해 공동의 외교정책을 채택하여 군사, 정치동맹관계를, ‘평화 5
아시아 국가들만의 역내협력을 위한 어떠한 지역통합 구도에도 반대의 입장을 분명히 했다.
공화당의 부시 전행정부는 특별히 아태지역 다자안보구상에 대해 강한 우려와 의구심을 갖고 있었는바, 1991년 아세안 확대외무장관회의 (ASEAN PMC)를 역내 다자안보 대화체로 활용하자는 동맹국 일본의 제안
결정지은 또 하나의 요인이다.
일본의 경우는 군사적인 안보와 경제적인 이해가 불가분의 관계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 일본외교의 원칙을 설정하는데 크게 작용한다.
1958년의 외교청서에서 밝힌 내용은
1. 미국을 비롯한 서구 자유진영과의 긴밀한 협조
2. 유엔중심의 외교
3. 아시아의 일원으로
이념적 동력으로 작동하였다. 또한 예외주의가 미국적 가치의 내적 보존에 치중하는 고립주의에 결합하였을 때에는 미국 제일주의(American First) 정서로 나타났다.
국가탄생에 대한 종교적 배경을 바탕으로 형성된 예외주의는 국가의 국제정치적 역할에 대해서도 차별성을 강조하게 되었다. 이는 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