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약전
자는 덕회(德晦), 호는 여헌(旅軒)이다.
고려 상장군 금용(金用)의 후손이며 덕녕부윤(德寧府尹) 안세(安世)의 8대손으로 증 이조판서 열의 아들로 명종 9년(1554)에 인동 남산에서 태어났다.
7세때 글을 배우기 시작했고 8세 때 부친을 잃고 11세때 학자인 신당 정붕의 아들 정각(鄭慤)이 보고 "
(1) 영남가단의 개념
최초로 ‘가단’이란 용어를 쓴 것은 조윤제의 《한국시가사망》 중 《경정산가단》의 기록이다. 조윤제는 말하기를
「김천택 김수장이 평민계급에서 돌출하야 시가계에 중진적 존재가 되니 그들을 중심하야 일세의 가인 가객이 바짝 일어나 경정산에 운집하야 일대의 성
장현광을 모신 동락서원을 중심으로 부녀자들이 춘유를 즐기며 부르던 노래
①시집살이에 골몰하던 색시가 바라고 바라던 기회를 얻어 친정에 돌아와 처녀시절의 벗들과 산수 좋은 곳에서 봄놀이한 것을 노래
②시집살이하던 새색시가 춘삼월에 시부모의 허락을 얻어 봄놀이 간 것을 노래
시부모께
장현광(張顯光), 지산(芝山) 조호익(曺好益)과 같은 거유(巨儒)들과 교유하면서 성리학에 심취하였다.
51세 때에 용진(龍津)에 있는 사제(莎堤)로 한음(漢陰)을 찾아가 종유(從遊)하면서 그를 대신하여 <사제곡(沙堤曲)>을 지었고 <누항사(陋巷詞)>를 지어 자기의 곤궁한 생활상을 노래하였다. 57세 때에는
장현광, 지산 조호익과 같은 거유들과 교유하면서 성리학에 심취하였다.
51세때에 용진에 있는 사제로 한음을 찾아가 종유하면서 그를 대신하여<사제곡>을 지었고 <누항사>를 지어 자기의 곤궁한 생활상을 노래하였다. 57세 때에는 한강이 동래 온천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대구 검단동 금호강변의 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