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운 어린시절부터, 經世治國의 뜻을 품고 成長하였다.
21歲 (1056年) 때 父親 蘇洵을 따라 아우 蘇轍과 더불어 科擧에 應試하기 위하여 京師로 갔다. 이듬해 정월 東坡형제는 나란히 進士에 及第하였다. 그러나 그 해 4月에 母親喪을 당하여, 嘉祐 4年(1059年)까지 고향 眉山에서 居喪하였다.
26歲 (10
소식, 소철의 아버지이고, 소식은 소철의 형이다. 아버지인 소순은 대중상부 2년에 탄생해 후에 친교를 맺은 구양수, 장방평보다 두 살 아래이다. 그의 형 소환과는 달리 학문을 싫어해서 소년 시절 다른 아이들처럼 책을 읽고 시문 짓는 법을 배우려고 했지만, 조금도 진보하지 않으므로 팽개쳐 버렸다.
한편, 당시의 특색이 뚜렷이 나타나는 것은 측전무후 때부터이다. 무후는 중국 역사상 유일한 여왕으로 역사가 중에는 이를 싫어하는 사람도 있으나, 그의 치세 동안의 화려하고 아늑한 기분을 무시할 수는 없다. 4걸이라 불린 왕발, 노조린, 낙빈왕의 네 사람과 심전기, 송지문 등은 이 시절의 시인이다
노래로 부를 수 있다. 풍은 민간에서 채집한 노래로 모두 160편이다. 여러 나라의 노래가 수집되어 있다고 하여 국풍이라고도 하며 15개국 노래로 구분되어 정리되어 있다. 대부분이 서정시로서 남녀간의 사랑이 내용의 주류를 이룬다.
〈시경〉의 내용은 매우 광범위하여 통치자의 전쟁ㆍ사냥, 귀족계
산문적이라는 비난도 받지만 제재(題材)의 확장과 더불어 송대의 시에 끼친 영향은 매우 크다. 사상분야에서는 유가의 사상을 존중하고 도교 ·불교를 배격하였으며, 송대 이후의 도학(道學)의 선구자가 되었다. 작품은 《창려선생집(昌黎先生集)》(40권) 《외집(外集)》(10권) 《유문(遺文)》(1권) 등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