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자는 전쟁 이후 신분제도의 해체, 토지의 영세화, 상공업의 발달, 정치의 불안정 등이 가족제도의 변화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요인 중에서도 성리학을 중심으로 하는 유교문화의 보급과 종법제도의 정착이 가장 근본적이고도 중요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본다.
제도화가 초기에는 쉽게 정착되지 못하였으며 임진왜란을 거치고 조선 중기 이후에 와서야 민간에까지 수용되고 확산되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부재직계가족제도는 세기 중엽을 전환점으로 하여 확립된 것이고 고려시대까지는 서류부가혼속과 더불어 가족 형태가 양계적 방계가족의
사회적인 지위는 가정 내에서의 역할과 상호 연관되어 작용하고 있어 포괄적인 사회개념 안에서 생각하여야만 한다.
고려시대 여성의 사회적인 지위를 가름할 수 있는 공간은 세 개이다. 먼저 가정 내에서 보면, 부모의 재산은 아들이나 딸에게 균등하게 상속되었고 또 부부 간의 재산은 별도로 운영
유교적 종법 체제를 뒤섞여 편의적으로 만든 신분등록제도가 호주제이기 때문에, 호주제는 처음부터 한국 가족의 현실이나 가족질서 그 자체와는 구분되는 법적 제도일 뿐이다. 일제가 강제로 이식한 호주제는 일제시대 내내 조선인에 대한 징병과 조세부과 등 식민통치의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이를 전국적으로 퍼뜨린 것은 바로 그러한 추세를 말해준다.
조선왕조의 주요 창업자의 한 사람인 정도전은 신랑이 신부 집에 머물면서 처가살이를 하는 고려~조선 초기 혼인제도에 대해 경계심을 갖고 있었다. 신랑이 처가에 머물면서 며느리도 시댁과 남편에게 소홀해진다는 이유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