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제주4·3사건
우선 4․3당시의 계엄이 법적 근거를 갖는 것인가 여부를 떠나서, 과연 4․3당시의 계엄하에서 자행된 토벌대의 만행이 계엄하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를 살펴보기로 한다.
1. 비상사태 및 국가긴급권의 의미
비상사태 또는 국가긴급사태란 국가의 존
Ⅰ. 서론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는 4.3의 진상과 그 역사적 의미를 국가가 기억하고 그것의 미래화에도 앞장설 것을 주문했다. 그러면 적어도 『보고서』의 결론 부분은, 즉 사건에 대한 새로운 정의와 그것을 뒷받침해 주는 몇 가지 사실해석들은 종래의 공적 기억을 대체할 새로운 역사적
민주화의 요구가 끊임없이 제기되어온 상황에서 정당이 제 몫을 다하지 못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국민적 요구를 수렴하여 민주화를 선도하는 역할을 수행하기보다는 시대 상황에 안주하거나 시대적 변화를 뒤쫓아가기에 급급했던 것이 한국 정당의 모습이었다. 한국의 정당들은 민의를 수렴하고
1945. 9. 18 ; 중앙선거관리위원회 1968:10). 또 18일에는 미군의 각 국장임명이 발표되는 등 109명의 장교가 군정시행과 동시에 각기 직무에 임명되었다. 다만 이들 미군정장교단원들은 전선에서 차출되어 한국의 실정이나 각자의 행정 직무에 관하여 사전의 지식이나 준비도 갖추지 않은 자들이었다.
그러
1919년 3․1 운동을 ‘반제 반봉건 인민민주주의 혁명운동의 개시점’으로 현대의 시작이라 보는 설과 ‘사회주의 체제의 성립기점’이라 주장하는 1945년 해방을 현대의 시작이라 보는 두 가지 설(說)이 공존하다가 잠정적으로 1945년 설에 합의하였으나 1980년 전후 1926년의 ‘타도 제국주의 동맹’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