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지역적 공간은 세종대에 도성 안과 도성에서 10리 까지를 경계로 삼고 있었다. 이른바 성저십리를 한성부에 포함시켰던 것이다. 이 성저십리는 조선후기 사산금표지역과 일치한다. 세종대 서울의 경계는 강이나 하천, 그리고 산을 기준으로 설정된 것이었다. 이와 같은 경계범위는 18세기의 인구
. 만오천 호에 불과하던 17세기 중엽의 서울인구가, 100년만에 거의 세 배나 되는 사만 여호로 늘어나게 된 상황은 이를 여실하게 보여준다. "서울은 돈을 가지고 살아가고, 팔도는 곡식을 가지고 살아간다"던 남공철의 말처럼, 서울은 돈을 매개로 분주하던 교역의 중심지로 자리잡고 있었다.
서울근교인 일산.김포지역에서 기원전 2,000년, 또한 평양 남경지역에서는 이미 기원전 1,000년의 쌀이 발굴되었다. 이 사실은 쌀의 역사가 고조선으로부터 시작된 4,000년의 긴 역사를 가졌음을 의미한다. 뿐만 아니라, 북부 서해안 지역일수록 오래된 쌀이 출토되었다는 사실은 쌀이 북방으로부터 전래된
조선후기 문헌에 자주 나타나는 여항이란 말에는 구체적인 사회상이 반영된 것이다. 즉 위항이란 어휘에 내표된 ‘인구의 조밀지역’이란 다름 아닌 도시의 주거지를 가리키며, 조선사회와 관련 짖자면 서울의 비(非)양반층의 생활공간을 의미한다. 강명관, 『조선후기 여항 문학 연구』, (서울 : 창
서울[京]의 행정구역상의 이(里)는 고대부터 있었으나, 지방행정상의 단위 명칭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고려 말기부터였다. 이정(里正)·이장(里長)의 명칭도 이때부터 보이기 시작하여 조선왕조 일대에 존속한다. 그 주된 임무는 이내(里內)의 인구 동행의 파악으로서, 태조(太祖) 초에 호구(戶口) 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