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지역적 공간은 세종대에 도성 안과 도성에서 10리 까지를 경계로 삼고 있었다. 이른바 성저십리를 한성부에 포함시켰던 것이다. 이 성저십리는 조선후기 사산금표지역과 일치한다. 세종대 서울의 경계는 강이나 하천, 그리고 산을 기준으로 설정된 것이었다. 이와 같은 경계범위는 18세기의 인구
[실학 - 조선조 사회가 귀족주의에서 평등주의에로 진보해 나가는 과도기의 양상이다.]
Ⅰ. 연구동향
실학이라는 용어는 우리나라뿐 아니라 중국과 일본에 이르기까지 동양 삼국에서 통시대적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실학은 일반적으로 조선후기에 형성 발전하였던 ‘근대 지향적’이고 ‘민족적
발전시킨 후기 민족주의 사학의 대표로 일컬어지는 정인보를 비롯하여 문일평, 손진태를 중심으로 그들의 역사인식에 대하여 조사하였고, 그것을 통해 작게는 후기 문화사학, 크게는 후기 민족주의 사학이란 무엇인지, 과연 그것은 사학사적 입장에서 어떤 의의를 갖고 어떤 한계점이 있는지에 대하여
최근 한 ․ 중 ․ 일 사이의 역사논쟁으로 동아시아 사회가 시끄럽다. 그 하나는 일본 역사교과서 왜곡으로 인한 한국과 중국의 반발이 그것이고, 또 하나는 동북공정을 둘러싼 한 ․ 중 간의 대립이다. 공교롭게도 우리는 이 중국과 일본 양측을 상대로 한 ‘역사 전쟁’에서 당사자가 되고
조선경제연구소 등 일본인 관학자의 조선사연구 조직이 체계화되어 한말에서 일제하에 이르는 조선의 사회경제 전반에 대한 방대한 연구를 추진하였다. 그 핵심내용은 조선인을 회유하고 ‘황국신민화’의 학문적 기초를 마련하는 동시에, 종전의 조선을 정체된 사회로, 일제하의 조선을 발전하는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