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르하치가 이끄는 건주여진이 주변의 여진 부족들을 아울러 세력이 점차 강성해지면서 달라져갔다.
그들의 강성함을 인식하면서 조선은 명과의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고심하였다. 대표적인 것의 광해군의 중립 외교 노선이다. 그러나 광해군이 인조반정으로 물러난 이후 대 후금 정책은 변
후금은 명에 대하여 전쟁을 포고한다. 이에 명은 조선에 원군을 요청하였다. 이에 광해군은 대외적으로 명과 후금사이에서 신중한 중립 외교 정책으로 대처하였다. 임진왜란 때 명의 도움을 받은 조선은 명의후금 공격 요구에 거절할 수 없었고 새롭게 성장하는 후금과 적대관계를 맺을 수도 없었다.
명의 몰락에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했다.
1616년, 누르하치는 `대금(大金)`이란 국호로 후금을 건국한 후 명과 대항하는 정책으로 나아갔다. 1618년에는 그동안 명에게 당했던 `7대한`을 갚는다는 명분 아래 정식으로 전쟁을 선포하였다. 이로써 중국의 정세가 급변하였고 조선은 그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후금(後金)을 세우고 연호를 천명(天命)이라 칭하였다. 일찍이 명군에 의해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잃었던 그는 명을 공격하였다. 명은 조선에게 구원병을 요청하였고, 동시에 후금은 중립을 지켜줄 것을 요구해왔다. 이에 광해군은 그의 탁월한 정치적 안목으로 중립을 지켰다. 명의 요청을 따르되 전세
1. 정묘호란의 정의
그림 . 정묘호란 발생 시, 후금군의 침입로
정묘호란(丁卯胡亂)은 1627년(인조 5년)에 후금이 조선을 침공함으로써 일어난 전쟁이다. 정묘호란은 인조 즉위 이후 집권한 서인의 친명(親明) 정책과 누르하치의 조선에 대한 주전론(主戰論)이 맞물린 결과이다. 정묘호란은 정묘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