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남한산성 답사 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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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문화사] 남한산성 답사 보고서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1. 서론

2. 병자호란과 남한산성의 역사적 개관
남한산성(南漢山城), 그리고 그 역사
병자호란(丙子胡亂)과 남한산성

3. 유적답사
1) 연무관
2) 개원사와 숭유억불의 역사
남한산성 : 숭유억불의 역사
3) 현절사와 삼학사(三學士)
현절사
삼학사(三學士)와 조선의 선비정신
4) 남한산성 행궁지
5) 수어장대

4. 결론

5. 답사후기
본문내용
2. 병자호란과 남한산성의 역사적 개관

남한산성(南漢山城), 그리고 그 역사

한반도의 허리부분을 흐르는 큰 강인 한강은 예로부터 우리 민족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여왔다. 역사에서 한강을 중심으로 이곳을 점령한 나라는 번성하였고, 빼앗긴 나라는 쇠퇴하였다. 남한산성은 이처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한강을 남쪽에서 바라보는 요새로서 서울을 지키는 외곽에 4대 요새로서의 기능을 하였다. 북쪽의 개성, 남쪽의 수원, 서쪽의 강화, 동쪽의 광주였다. 남한산성은 ‘백제 온조왕 13년에 산성을 쌓고 남한산성이라 부른 것이 처음’이라고『고려사』와『세종실록 지리지』에 기록되어 있다. 그 후 신라 문무왕 때, 조선 선조와 광해군 때 등 여러 차례 개축한 것으로 나타난다.
남한산성은 서울에서 동쪽으로 약 24km 떨어진 광주군 중부면 산성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서쪽에는 일장산(해발 497m), 동쪽으로는 봉암(해발 479m)을 둘러 본성의 길이만도 9km에 이르는 거대한 성이며 그 평면형이 동서로 긴 장방형을 이루고 있다. 또한 성 밖의 주변부가 높고 험한데 비하여, 성안으로는 가운데가 낮고 평평한 분지형으로 성 밖에서는 성 안의 동태를 살필 수 없고 풍부한 수원(水原)과 넓은 활동 공간을 갖는 장점이 있어 산성의 지형으로는 가장 좋다고 할 수 있다. 남한산성이 지금과 같은 모습을 하게 된 것은 조선 인조 때부터 순조 때까지 계속된 축성 역사(役事)의 결과이다. 1894년에 산성 승번제도가 폐지되고, 일본군에 의하여 화약과 무기가 많다는 이유로 1907년 8월 초하루 아침에 잿더미로 변하고 말았으나, 오늘날 남아있는 유적과 문화재의 재발견으로 그 중요성이 다시 한 번 부각되고 있다.

병자호란(丙子胡亂)과 남한산성

한반도와 주변국의 관계를 이야기할 때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 중 하나가 북방민족이다. 그 중 우리의 주제인 병자호란과 남한산성과 관련된 민족은 여진족으로, 여진족을 견제하고 있었던 주변국인 명과 조선이 임진왜란으로 인해 국력이 약해진 사이, 여진족은 16세기 말 급격히 세력이 팽창하였다. 그 동안 명에 복속하여 있던 누르하치가 부족을 통일하고 1616년 후금(後金)을 세우고 연호를 천명(天命)이라 칭하였다. 일찍이 명군에 의해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잃었던 그는 명을 공격하였다. 명은 조선에게 구원병을 요청하였고, 동시에 후금은 중립을 지켜줄 것을 요구해왔다. 이에 광해군은 그의 탁월한 정치적 안목으로 중립을 지켰다. 명의 요청을 따르되 전세의 상황을 보아 강홍립에게 향배를 지시한 것이었다. 그 후 광해군이 인조반정(1623)으로 쫓겨나고 인조가 왕에 즉위하였다. 인조는 친명배금의 정책을 썼으므로 후금과의 관계는 자연히 나빠졌고 이것은 후금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당시 조선의 서북방에서는 명나라 장군 모문룡이 주둔하고 있어 후금의 배후를 교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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