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의 갈등이 심화되는 과정에서 명은 “철령(鐵嶺)을 따라 이어진 북쪽과 동쪽과 서쪽은 원래 개원로(開元路)에서 관할하던 군민(軍民)이 소속해 있던 곳이니, 중국인•여진인(女眞人)•달달인(達達人)•고려인(高麗人)을 그대로 요동(遼東)에 소속시켜야 된다.” 라고 주장하며 철령위(鐵嶺衛
조선에 원군을 요청하였다. 이에 광해군은 대외적으로 명과 후금사이에서 신중한 중립 외교 정책으로 대처하였다. 임진왜란 때 명의 도움을 받은 조선은 명의 후금 공격 요구에 거절할 수 없었고 새롭게 성장하는 후금과 적대관계를 맺을 수도 없었다.
광해군은 강홍립을 도원수로 삼아 1만 3000명의
중국을 둘러싼 조공국들의 `울타리`가 일본과 서구열강의 침략이 강화되면서 무너지기 시작한다. 종래 중화제구체제 내에서 중요한 조공국에 위치하고 있던 유구, 조선, 월남 등이 외부에 압박에 의해 차례로 중국의 지배권을 이탈하게 되고, 결국은 중국자체 및 그 문명의 붕괴와 해체의 위기에까지
중국적 문벌제도에 접목시켜 胡漢一元化를 꾀했다. 선비족 자체의 분열과 황제권의 강화하고 북위 정권은 한인 세족을 화북 통일의 후원자로 이용하면서도 한인의 우월성이나 선비족을 멸시하는 자세에 대해서는 정복자로서의 우월감을 가지고 용납하지 않았다.(胡·漢의 귀족 체제의 갈등과 타협의
들어가며...
임진왜란 이후 병자호란 이전까지 조선은 명국의 참전으로 '재조지은'이라는 명분이 형성, 전개되었고, 조명 양국은 16세기 말~17세기초의 선조, 광해군, 인조 대를 거치면서 '재조지은 체제'가 각각 형성, 변형, 복구되는 관계를 경험한다. 명의 도움을 받아 임진왜란을 극복했고, 광해군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