맺어둔 인맥을 총동원해 개발 정보를 사전에 입수하여 투자하거나 일제 당국으로부터 인.허가권을 특혜 받는 방식으로 사업을 확장 했다. 사람들은 그를 ‘땅 투기꾼 1호’로 본다. 특히 그는 대전 지역 땅 투기에 성공하여 1-2전을 주고 산 땅이 하루아침에 1백 원 이상이 되어 떼돈을 거머쥐게 된다.
친일시
1939년경에 나타나기 시작한 일제 어용 시들은 1941년에 이르면 전 문단에 확산된다. 1940년대의 일제 어용 시를 일제의 공식적 명칭으로 말하면 ‘국민시(國民詩)’이다. 이것은 또한 일본의 전시체제의 확립과 국민의 전쟁 동원을 위한 목적으로 쓰여졌던 ‘국민시’와 발맞춰 나가던 친일문학
「민족적 경륜」 등의 논설을 써서 발표했다. 1939년에는 친일 문학인들의 모임인 조선문인협회 회장이 되었다. 이후 줄곧 친일 연설을 하며 전국을 순회했다. 해방이 되자 친일파로 지목되어 곤란을 겪었고, 1949년 반민법에 걸려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기도 했다. 6·25전쟁 중인 1950년 7월 납북되었다.
이광수의 연보
1892(1세) 음력 2월 1일 평북 정주 군에서 정주 이씨 종원의 외아들로 출생.
1902(10세) 8월 부보 콜레라로 차례로 사망
1905(13세) 일진회의 유학생으로 도일
1916(24세) 와세다 대학 철학과에 입학
1917(25세) 장편〈무정〉 단편 〈소년의 비애〉
1919(27세) 조선청년독립선언서(2.8독립선언서)기
결혼을 하고, 9월 에사이토(齊藤實) 총독과 면담 등등 화려하고 세속적인 출세가도의 길로 들어섰다. 뿐만 아니라 아베를 통하여 사이토에게 보낸 건의서 <유랑 조선 청년 구제선도의 건>(1921. 4)은 이광수가 당시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중등 이상의 교육을 받은 조선인 가운데 중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