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들어가는 말
성리학이 이론적으로 심화되었던 조선 중기에 비해 조선후기는 그것이 교조화되는 경향을 보인다. 그러한 경향은 예송논쟁으로 대표되는 예학에서 시작된다고 할 수 있고, 본격적인 시작은 인조반정 이후 서인이 정국 주도권을 장악하면서부터 일 것이다. 서인은 의리 명분론을 강화
Ⅰ. 서론
성리학이 우리 나라에 들어온 시기를 잘라 말하기는 어렵다. 대체로 이것이 중국 송에서 발흥할 무렵, 즉 고려 인종(인종)대를 전후한 시기(11˜12세기)부터 알려지지 않았나 생각된다. 당시 고려에서는 송의 서적을 빈번하게 수집해 들였고, 외교경로를 통해서 윤언이와 같은 대학자가 송에
성리학은 조선사회를 이끌어가는 정치세력을 성리학자로 바꾸었으며, 고려시대의 지배이념인 불교의 지위를 크게 하락하게 하였다. 고려시대에는 간쟁을 담당하는 낭사가 독립적이지 못했지만, 조선시대에는 사간원으로 독립하게 되었다. 이역시 임금이 이상사회를 만들기 위해 성인과 같이 정치를
조선침략 전 일본의 상황
일본은 1443년에 맺은 계해약조에 따라 삼포[웅천(지금의 진해)의 내이포(또는 제포), 동래의 부산포, 울산의 염포]에는 일정한 숫자의 일본인이 거주하면서 무역활동을 벌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항거왜인들보다 불법거주자들이 늘어갔고 그 폐단이 일어났다.
일본은 1467년 오
성리학이 理와 氣의 형이상학으로서 자칫하면 도교나 불교와 같이 空理와 空論을 농하는 경향을 면하지 못한 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즉 그것은 성리학이 실생활과는 거리가 있는 공리성을 띠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성리학은 특히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고 난 조선조 후기의 여러 방면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