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승리를 하였다. 명성 황후를 죽인 사건이 을미사변으로 을사조약 즉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 박탈을 위하여 조약을 맺었다. 첫 번째 강화도 조약 이후 우리나라의 조약을사조약이다.
을사조약의 내용은 을사보호조약 · 제2차한일협약 · 을사오조약(乙巳五條約) · 을사늑약이라고도 한다. 제3차
외부대신이 되고, 1905년 한규설(韓圭卨) 내각의 외부대신으로 을사조약에 조인. 이후, 한규설의 뒤를 이어 수상 격인 참정대신이 되었다. 1909년에는 이완용 내각의 내부대신이 되어 1910년 한일 병합 조약에 서명한 뒤, 일본 정부로부터 훈1등 자작 작위를 받고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에 임명됨. 10만 원
을사늑약 체결 당시 시대적 배경
국내정세
일제는 19세기 후반 세계적으로 제국주의 열강의 영토분할과 식민지지배가 휩쓸던 정세에 편승, 한국을 국제적으로 고립시켜가면서 한국에서의 독점적 지배권을 확대시켜갔다. 즉 제국주의 열강의 세력권 분할 등의 세계 정책을 교묘히 이용, 중국에서 영
일본 측의 승리로 기울어지자 한국정부는 5월 18일자의 조칙(詔勅)으로 한국과 러시아 사이에 체결되었던 일체의 조약과 협정을 폐기한다고 선포하는 동시에 러시아인이나 러시아 회사에 할애하였던 이권도 전부 취소하였다. 이로써 일본은 한국에 대한 내정간섭을 심화시켜 8월 외부대신 서리 윤치호(
2> ‘을사조약’ 체결의 주역
러일전쟁이 일본 쪽에 유리하게 되자 친러파에서 친일파로 변신하여 '을사보호조약' 체결을 주동한 이완용은 그 공으로 의정대신 서리 및 외부대신 서리가 되었다가(1905. 12. 8), '을사보호조약'의 결과 조선의 통감이 된 이토의 추천으로 의정부 참정대신이 되었고(1907. 5.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