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 중에 하나로 부를 수 있는 1572년 8월의 '성 바르톨로뮤의 대학살'을 그린 영화이다. 그리고 이 영화는 이러한 대학살을 배경으로 당시 프랑스 왕실의 불륜과 음모를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프랑스를 타락의 나락으로 떨어뜨린 것은 다름 아닌 종교, 즉 구교와 신교였다. 우리에게는 종교분쟁이 잘
앙리 2세의시기에, 프랑스의 신교는 조직화되기 시작했다. 칼뱅파의 교리와 조직을 완전히 수용하여 위그노라는 집단으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프랑스 종교개혁의 특징은 귀족층의 참여가 두드러졌다는 것이다. 왕족인 나바르 가, 부르봉 가, 콩데 가, 샤티옹 가, 앙들로 가, 콜리니 등의 쟁쟁한 대 귀족
종교 전쟁으로 국론은 양분되고 민생은 도탄에 빠져있었다. 결혼식이 끝나고 6일간 축제가 열리자 구교도와 신교도는 드디어 화해의 세상이 온 것으로 알고 기뻐한다. 그러나 카트린의 무서운 음모는 결혼 축제가 끝난 날 새벽에 드러난다.
프랑스 역사에 ‘성 바톨로뮤의 대학살’로 기록된 사건.
, 이틀 후 파리에서는 샤를르 9세의 여동생인 마르거리트 드 발로와와 신교도인 앙리 드 나바르(Henri de Navarre, 앙트완 드 부르봉의 아들)의 결혼식에 참석한 신교도들에 대한 대학살사건이 벌어진다(St. Barthelemy의 학살). 1574년 샤를르의 사망으로 앙리 3세가 즉위한다. 하지만 그는 정치적으로 무능했고,
‘두 개의 관 사이에서 살아난 카트린’은 생과 사 사이의 야누스적인 출생비화만큼이나 야누스적인 인생을 살아온 여걸이다.
장 오리외의 카트린 드 메디치에 대한 평가는 서문만을 읽어보더라도 알 수 있다. 그는 때로는 천사같고 때로는 악마같은 카트린을 경배했다. 때문에 나 또한 장 오리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