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자학자들이 '사단'과 '칠정'이라는 두 가지 개념으로 인간의 심리 현상을 분석한 것은 이유가 있다. 더욱이 이러한 분석이 개인의 주관적 독단에 그치지 않고 논쟁을 통해 객관적 사고로 넘어가기 위한 노력이었다는 것은 특이하다. 사상사적인 입장에서 볼 때 이 논쟁은 심성론과 이기론의 결합을 처
퇴계 이황의 철학 사상
퇴계는 심의 지각 판단인 인심과 도심을 어떤 기준을 가지느냐에 따른 작용 자체로 구분하고 있다. 즉 판단의 기준에 따라 인심과 도심으로 나눈 것이다. 그럼 인심과 도심3이란 무엇일까? 인심은 주관적인 판단으로 신체의 기운과 욕구의 생기는 것이다. 예를 들
퇴계 선생의 아버지는 유교정신이 투철하신 분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혼자서 ’주자‘의 책을 스승으로 삼고 학습했으며 늘 혼자 학습해야 했기 때문에 항상 겸손하였고 신중했다. 후실인 친어머니 박씨의 현명한 가르침 밑에서 총명한 자질을 키워갔다.
어머니의 교육관이 투철하여
주자학朱子學·퇴계학退溪學이 유입되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실각 후 세워진 도쿠가와 정부에 의해 관학으로 자리잡는다. 여기서 우리는 무인중심사회였던 일본이 어째서 당시 유교사상의 정수精髓라 할 수 있는 주자학이 관학으로 채택했는지에 대해 궁금증을 가지게 되었다. 또한 이렇게 유입된
주자 사후 100여년이 지나서 원나라로부터 이루어 졌다. 安珦이 도입한 성리학은 백이정, 우탁, 이제현, 이인복 등에 의하여 연구되었으나, 충분히 소화되어 토착화하기 시작한 것은 牧隱 李穡에 이르러서였다. 목은 이색에 의하여 수용되고 정착된 한국의 성리학은 그 뒤 권근 등으로 이어지다가 퇴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