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호연(孟浩然) ·왕유(王維) ·고적(高適) ·잠삼(岑參) ·왕창령(王昌齡) ·왕지환(王之渙) 등을 들 수 있다.
중당(中唐)의 시인으로는 한유(韓愈)와 백거이(白居易)를 대표적으로 든다. 한유는 기험(奇
險) ·호방(豪放)한 장대한 미(美)를 사랑하였고, 백거이는 평이하고 찬찬한 표현으로 《장한가(長恨
민간가요의 정신을 시에 도입한 것에 기인하는데, 그의 한없는 감흥을 자유롭고 분방하게 노래하기에는 율시보다 고시 특히나 악부나 절구의 형식이 잘 맞아 떨어졌을 것이다. (절구도 본래 민간가요로서 전래된 것이다.)
<촉도난 蜀道難>,<고풍 古風>59수,<장진주 將進酒> 등의 17수의 악부시가 전한다.
표시하였다. 백거이의 <진중음>이나 <신악부>등은 그 한 예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장한가>나 <비파행>과 같은 소설적인 구성을 가진 이야기 시를 만들어 서민층에 많이 읽혔다. 백거이 등과 대립된 다른 한 무리의 시인 의중형은 무늬에 있어서 여러가지 변화를 낳았으며 당말까지 계승하였다.
백거이와 두목과 이상은 같은 대가들이 있지만, 이백과 두보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이 두 사람은 같은 시대에 같은 길을 걸었으면서도 우열을 가릴 수 없을 만큼 시의 최고봉을 더불어 누렸다. 앞서 밝힌바와 같이 이백을 시의 신선(시선)으로 받드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두보
성황을 이루어 오언 및 칠언의 율시와 절구의 형식이 완성되어 성당기에 이백·두보의 2대 시성을 비롯하여 시화일치의 묘미를 보여준 왕유, 전원과 자연을 읊은 맹호연, 정로이별을 읊은 고적·왕창령 등이 나오고, 중당기에는 백거이·원진, 만당기에는 두목(杜牧)·이상온·온정균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