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쉰이었다. 노신은 그 혼란의 시기에 가장 먼저 헤쳐 나가야 하는 문제가 바로 국민 계몽이라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따라서 그의 문학 작품 속에는 그 당시 국민성을 비판하고 그들을 계몽하려는 내용이 담겨있었고, 시대 배경은 항상 격동의 시대인 그 당시로 잡았다.
루쉰의 작품에서 인물은 그의
병환이라는 불행을 만나게 되었다. 옥바라지와 병구완으로 가세는 날로 기울어갔다. 어린 루쉰은 날마다 전당포와 약방을 드나들어야 했고, 일가친척들로부터 멸시를 받고 한때 도련님으로 받들어주던 주위 사람들로부터 냉대를 받았다. 이 체험은 훗날 루쉰의 문학과 사상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문학이 한국의 근대와 일본의 근대를 비춰주는 하나의 거울이 되기 때문이다.
루쉰은 50여년의 결코 길지 않은 생애를 통하여 참으로 상상을 초월한 업적을 남겼다. 루쉰의 업적과 면모가 다양하였던 만큼 루쉰을 한 마디로 규정하기는 어렵지만 암울한 근대 중국의 격동 속에서 적과 동지에 대하여 스
노신의 문학세계에 중첩되는 이미지가 무엇인지 살펴보자. 첫째, 혁명가의 죽음과 구경꾼의 이미지. 이것은 환등기 사건에서 <광인일기>, <약>, <아Q정전>, <시중>, <주검> 등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이미지로, 중국을 변화시키려는 사람과 사건을 구경거리로 삼아 일회적인 해
실패 후 망명한 캉유웨이[康有爲] 등의 개혁파와 연합을 모색하기도 하고, 의화단운동(義和團運動)을 전후해 양광총독(兩廣總督) 이홍장을 황제로 추대하여 양광 지방을 독립시키려 했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쑨원은 다시 홍콩 흥중회의 조직을 통해 후이저우[惠州] 봉기를 조직했으나 실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