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 2) 학문연구기관인 집현전을 궁궐 안에 설치하게 되었다.
본론
Ⅰ. 집현전의 연원
집현전 제도는 중국에서 연원한 것으로서 한(漢)나라 이래 있어 왔다. 그러나 제도가 정비된 시기는 당나라 현종 때로서, 학사(學士)를 두고 시강(侍講 : 강의)·장서(藏書 : 책의 보관)·사서(寫書)·수서(修書)·
세종의 스승이기도 했다. 이 점은 대단히 중요하다. 집현전 설립을 통한 문풍 진작과 경사 강론의 확산에 대해서는 박은도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었고 세종 또한 같은 생각을 물려받았을 것이다.
신하들의 건의도 있고 해서 잔뜩 기대를 품고 있던 세종은 막상 집현전 설립과 관련한 구체적인 움직임
집현전과 비슷한 기능을 하는 홍문관을 설치하여 언론기능을 강화하고 영남지역을 중심으로 지방에서 성리학을 공부하며 후세양성에 힘을 쓴 사림세력을 등용하여 신권을 훈구파와 사림 두 세력으로 나눠 왕권을 강화하려는 노력을 한다. 이에 훈구파가 사림을 탄핵하기 위한 노력이 여러 차례 이루
집현전의 동의를 얻어서 실행하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세종 때에는 의정부의 합의 체제가 형식상 존중되면서 왕권도 왕권대로 집현전을 매개로 강화되어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이루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집현전학사들은 그들 자신의 능력과 세종의 현실적인 필요에 따라 정치문제에 관
관리의 복귀가 이루어질 때 이를 대간이 동의하는 권한을 말한다. 증유서경은 각 지방의 지방관이 진상하는 특산물이 뇌물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지 판단하는 일을 말한다. 하지만 이것은 법령의 실제화 단계에는 이르지 못했다.
라) 정치참여기능
왕이 중신을 만나서 정치적인 보고와 자문을 구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