쯔빙글리가 루터의 영향을 받았는가하는 문제이다.
("나는 루터의 이름을 내세울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나는 그에게서 아무것도 받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내가 그의 저작에서 읽은 것은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서도 찾아볼 수 있는 것들이다" 라고 하였다.)
.........▷넷째, 쯔빙글리의 종교개혁은 종종
그를 빼내어 대학 교육을 받도록 비엔나(Vienna)로 보낸다. 1500 년부터 2 년간 비엔나에 머물면서 본격적인 인문주의 수업을 시작한다. 여기서 독일의 대 인문주의자이며 고전 문학 선생으로 활약하고 있었던 콘라드 켈티스로부터 고전문학에 대한 지식을 쌓았으며 음악에도 조예를 깊이 하였다.
대한교회의 철저한 무관심은 종교개혁의 일어나게 했던 중요한 원인들 중에 하나이다. 정치적으로도 교회지도자들의 권위가 실추되는 과정은 명백하였다. 1515년 9월 마리그나노에서 프랑수와 1세가 교황청과 스위스 연합군을 격파하고 승리를 거두자, 프랑수와 1세는 이탈리아 문제에 간섭할 수 있게
종교개혁은 점점 확대되어 그 움직임이 유럽 곳곳에서 나타났다. 그중 재세례파는 유아세례를 부정하고 성경의 내용에 근거하여 스스로의 판단에 의한 신앙 고백하는 사람에게만 세례를 베풀어야한다는 교리를 주장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재세례파는 16세기 종교개혁기에 스위스에서 시작되었는
부르죠아적인 도시 의회들이 교회의 행정 조직에 대항하여 점차 더욱 많은 권한을 요구함으로서 중세의 봉건적 종교 권위에 대한 도시들의 반항이 뚜렷이 나타나고 있었다. 이러한 특이한 도시 공화정치를 배경으로 하여 독일계 스위스종교개혁은 울리히 쯔빙글리의 지도 아래 발전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