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서 론
신라의 헌강왕이 학성(지금의 울산)에 노닐다가 돌아가는 길에 개운포에 이르러니 문득 한 사람이 왕의 앞에 나타나 가무하여 덕을 찬양하고는 왕을 따라 서울에 들어왔다. 스스로 처용이라 이름하고는 달밤이면 거리어세 노래 부르고 춤 추다가는 어딘지 모르게 사라졌다. 그러므로 당시
〈들어가며〉
‘처용’은 그 의미가 복합적이고 다층적이기 때문에 신라 시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작품의 소재가 되고 있다. ‘처용’에 관한 최초의 기록인 『삼국유사』〈처용랑 망해사〉조의 기록은 문맥 안에 역사적인 사실과 아울러 신화적인 상징 및 은유적 표현을 함께 가지
처용이라 했다. 왕은 미녀 한사람을 그의 아내로 짝지어주었다. 그것은 그가 동해로 되돌아가지 않도록 마음을 잡아두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또 그에게 급간의 직위를 내려주었다.
처용의 아내는 무척 아름다웠다. 이 아름다운 처용의 아내를 역신이 사랑했다. 역신은 사람으로 화하여 밤중에 처용의
Ⅰ. 개요
「삼국유사」‘처용량 망해사’조에는 신라 처용가의 노래말과 함께 이 노래가 만들어진 사연, 그리고 처용의 정체가 서술되었는데 이 기록으로 보아 처용의 행위는 무속신앙의 무격과 같은 역할을 담당했던 인물로 볼 수 있다. 즉, 신라 헌강왕 때에 처용굿은 나라의 불안한 조짐을 없애는
Ⅰ. 처용가(신라의 향가)의 배경설화
아내를 빼앗긴들 어떠하료 하던 처용이 노래는 유사 권 2 처용랑조에 실려 있다. 제 49대 헌강왕 때에 서울서 바다 어구까지 집들이 총총 들어선 가운데 초가가 한 채도 없으며 길에는 피리 소리, 노랫소리가 끊이지 않고 비바람도 철을 따라 순조로웠다. 어느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