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실의ꡕ(天主實義) 세 문헌을 모아서 조목별로 분석하고 비판하였다. 그는 서학이 영혼의 불멸을 주장하는 것을 “살기를 바라고 죽기를 싫어하는 이기심”이라 규정하는 성리학의 사생관과 의리론을 전제로 하였다. 신, 곧 천주를 상제로 이해하고 천주가 만물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
따라 서양문물을 조선에 소개하고 동시에 서양화를 유입하기에 이르렀다.
조선의 이승훈이 북경에 가게 되었을 때(1783) 종교실천운동의 중심 인물이었던 이벽의 간곡한 부탁으로 북경의 그라몽 신부로부터 입교절차를 받고 천주실의 십자가 성화 등을 받아와서 이벽에게 넘겨주었다.(1784) 이벽은 곧
천주교의 교리와 사상을 뜻하는 내용들과 서구의 과학 기술을 의미하는 내용들을 담고 있었다.
중국을 통한 서양문화가 조선에 전래된 것은 17세기 초부터였는데, 최초의 것은 세계지도와 마테오 리치가 지은 《천주실의》였다. 당시의 지식인들은 이러한 문물과의 접촉으로 영국․프랑스 등의
천주실의>를 소개한 책으로 유명한 <지봉유설 芝峰類說>을 쓴 이광(李光 1563-1628), 성리학에서 실학으로의 전환점에 서 있는 <반계수록 磻溪隨錄>을 저술한 유형원(柳馨遠), 탈주자학적 경학해석에 물꼬를 텄던 서계 박세당(朴世堂) 등이 활약했던 17세기는 서로 다른 학문적 관심과 배경에서 개별적으로
우리의 전통사회는 전형적인 유교사회였다. 하지만 근대화 그리고 현대화되면서 유교는 그다지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오늘날에도 부모를 공경하고 제사를 모시는 모습에서 우리가 유교적 생활습관을 완전히 벗어나 있는 것은 아니다. 사실 동양에서 수천 년 동안 사상적 주류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