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종의 정치적 이데올로기로써의 성상융회
- 실천신앙통해 왕실과 기층사회를 연결시켜주는 매개체로써의 성속무애
- 광종대의 전제주의와 운명을 같이 함
(2) 성상융회사상
- 광종대 전제정치의 사상적 뒷받침
- 의상 화엄사상의 융회적 성격을 계승
- 화엄사상을 근간으로 그 내의 법상종 사상
Ⅰ. 삼국시대의 불교
한국사가 전개되면서 수많은 사상이 들어오고 나가고 했다. 어떤 사상은 아류로 머물기도 했지만 어떤 사상은 주체적 입장에서 새롭게 해석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사상을 다루면서, 예를 들어 불교의 경우 불교 전래라는 말은 조심해서 쓸 필요가 있다. 불교 수용 이전의 불교 전
-무신정권과 불교계의 관계
무신정권과 기득권을 누렸던 교종 쪽의 불교사원은 서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지 못했다. 불교 쪽에서는 무인들을 정권의 쟁탈자로 보았고, 그에 따라 직접 무인정권에 싸우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무인들의 갈등에 참여하기도 하고, 왕과 귀족들이 왕권회복을 시도할
2) 천리장성 착공
거란족이 요를 건국하고 993년(성종 12)부터 1019년(현종 10)까지 총 3차에 걸쳐 고려를 침입하였다. 이때 서희, 강감찬 등의 투쟁으로 모두 물리쳤다. 그 후 고려 정부는 북방민족의 남침을 막기 위한 대비책을 강구할 수밖에 없었다. 고려 초기부터 북방민족의 침입에 대비하려 하였으
균여의 계통인 개태사의 수기, 천기 등으로 법계가 교체되면서 화엄학의 내용이나 성격이 바뀌어 의천에게 비판받았던 균여의 화엄학이 재평가 되고 있었다. 그리고 천태종에서도 역시 의천 직계의 덕소 등에서 백련사의 요세로 법계가 바뀌면서 禪과 구분되어 法華의 실천신앙이 강조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