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육사, 윤동주 이들을 민족 시인이라 평가하고 불려진다. 이들은 30년대부터 40년대 까지 실질적인 저항운동에서 비롯하여 문학운동에 이르기까지 나라의 독립에 몸 바친 사람들이다. 우리는 이 시인들 중 차이가 확연히 들어나면서 같은 민족운동으로 평가받고 있는 이육사와 윤동주에 대하여 좀 더
대한 인식을 갖추게 되었다.
중기는 사회적 활동기로 가문의 영향으로 민족문제에 일찍 눈을 뜬 그는 1924년에 일본에 1년 정도 유학을 하면서 민족의식이 더욱 강화되었고, 귀국 후 대구에서 문화활동을 벌였으며, 1926년 쭝산대학(中山大學)에서 수학하였으며, 1927년에 귀국했다가 장진홍 의거에 연루
시적 노력은 시조 부흥론이다. 주로 중인지식계층에 의해 명맥을 이어온 시조는 일본 식민주의에 대항하여 한국적인 것을 발굴하고 지킨다는 명목 아래 한국 지식인들의 비상한 관심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지적 제스처에 불과하던 시조를 정당하게 예술적 차원으로 끌어올린 것은 이병기에 의해서이
이육사를 기리는 광야시비가 있다. 이 비는 1968년에 낙동강 강변에세워진 것을 이곳으로 옮겨 놓은 것이다. 앞면에는 대표적인 광야를 새기고 있고, 뒷면에는 시인 조지훈이 육사를 추모하고 있다. 기록된 육사의 생애에서 독립운동에 대한 내용은 사실과 다르게 기록된 것이 많다. 그 당시로서는 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