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백자가 발달하면서 사라진 자기이지만 분청사기 양식은 국가의 제재를 받지 않아 그 양식이 자유롭고 율동적일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 청자와 신라 백자는 그 나라의 정치 체제의 영향을 받아 그 문양이 정교하고 화려할 수 있었고, 백자의 경우 도화서의 화가들이 그린 청화백자는 그
조선 전기의 작품이 많이 전하며, 조선후기에는 백자청화의 공예적 문양으로도 많이 그려진 주제이다.
-산시청람(山市晴嵐: 뫼 산/ 시가 시/ 맑을 청/ 남기 람-산에서 이는 아지랑이 같은 기운)
: 쾌청하고 아지랑이가 이는 봄철의 아침나절을 배경으로 산시를 표현한 장면.
-연사모종(煙寺暮鐘: 연
상감백자·청화백자(靑華白磁)·철화백자·진사백자(辰砂白磁) 등이 제작되었다. 백자는 초기에는 소량의 최고품만을 생산하여 왕실에서 사용했지만, 분청사기가 소멸되는 17세기경부터는 도자기의 주류를 이루게 되며 관요(官窯)인 경기도 광주의 분원(分院)을 중심으로 제작되었다. 이밖에도 조선시
도자기라고 하면 으레 고려청자, 조선분청자와 백자만을 의미하는 것으로 알고 있으나, 실제에 있어서는 옛 도기를 포함해야한다. 인류가 처음 토기를 만들어 사용한 시기는 대략 일만 년 전에서 육천 년 전 경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신석기 시대인 7~8천년 전부터 토기를 만들어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도자기에 대해 배울 때, “우리나라가 도자기 제조기술을 중국으로부터 배웠지만, 나중에는 중국을 초월한 수준으로 발달하여 역수출했다”라는 문구만 기억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도자기는 조선시대 중후기에 크게 발전하지 못했지만, 중국은 청화백자가 크게 발달하였다. 일본은 조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