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치원(857~?)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적지 않은 찬사를 해 왔고, 또 많은 연구가 있었다. 차용주, “최치원연구”, 『韓國漢文學硏究』, 경인문화사, 1996, p.7.
그는 당시 동아시아의 공동 문어였던 한문 문장을 빼어나게 구사하여 동아시아의 선진 문화 제국인 당나라에서도 文名을 날린 뛰어난 문장
> 등과 사서(史書)로 《제왕연대력》이 있으며, 불교 관련되는 저술로 <부석존자존>,<법장화상전>, <석이성전> 등이 있었으나, 오늘날 전하는 것은 <계원필경>, <법장화상전>, <사산비명(四山碑銘)> 뿐이고 그 외 <동문선>에 시문 약간, 사기(寺記)등에 기(記), 원문(原文), 찬(讚) 등이 전할 뿐이다.
최치원의 역량을 우리는 현대적으로 계승해야 하겠다. 오랫동안 유학을 했으면서도 외국 문화에 매몰되지 않고 우리 사상의 우수성과 특징적인 체계를 찾아냈다는 점을 중시해야 한다. 아무리 아름답고 현란한 문화와 사상도 그 자체가 우리 민족의 구체적인 삶에 도움이 될 수 없다는 점을 깨닫고 풍
1. 머리말
고운 최치원의 삶은 남북국 시대의 상황과 문제와 긴밀히 얽혀 있다. 당시 남북국 시대와 당 나라와의 관계, 국내적으로는 육두품의 신분적 차별이 최치원의 삶의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 그는 당 나라로 유학을 가고 귀국 후 정치활동을 하지만 신라 말기 상황과 신분의 문제에 부딪혀 정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