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김정희의 생애
김정희는 정조 10년(1786년) 10월 3일에 지금의 추사고택에서 한다리 월성위가의 혈통을 이어받아 이조판서를 지낸 유당 김노경과 김제군수 유준주의 따님인 기계유씨 사이의 장자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 자는 원춘이며 호는 추사, 완당을 비롯하여 예당, 보담재, 담연재, 승연, 현
강도순의 집으로 옮겨 살았다. 9년이란 짧지않은 세월동안 추사는 지방유생과 교류하는 한편 학도들에게는 경학과 시문과 서도를 가르쳐 주었다.
1848년(헌종 14년) 풀려나왔고, 조정에 복귀한지 2년만인 1851년(철종 2) 헌종의 묘천(廟遷) 문제로 다시 북청으로 귀양을 갔다가 이듬해 풀려났으니 말년
연구하여 자신의 독특한 필체인 추사체를 완성시켰다. 그가 이룩한 독특한 서체는 그의 학문적인 깊이와 함께 오랜 유배 생활의 고독과 연관지어 해석되기도 한다. 서예를 바탕으로 그림에서 또한 이른바 남종 문인화의 진수를 유감없이 보여 주었는데 거기에는 특유의 개성과 천재성이 번득인다.
연구하여 자신의 독특한 필체인 추사체를 완성시켰다. 그가 이룩한 독특한 서체는 그의 학문적인 깊이와 함께 오랜 유배 생활의 고독과 연관지어 해석되기도 한다. 서예를 바탕으로 그림에서 또한 이른바 남종 문인화의 진수를 유감없이 보여 주었는데 거기에는 특유의 개성과 천재성이 번득인다.
추사김정희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소년으로 사절을 따라서 북경에 가서 당시 중국의 고증학자 완원, 옹방강 등과 교유, 토론하고 서울에 돌아와서도 서신 왕래를 자주 하였으며, 종래 조선의 고루공허한 학풍에 항거하였다. 그는 자기의 <실사구시설>에서 말하기를 “학문의 도는 마땅히 요, 순,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