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머리말
원나라에 의한 충혜왕의 죽음으로 국왕이 된 충목왕은 전대의 파행적인 정치운영을 극복해야 할 과제를 안고 있었다. 기존의 정치운영에 반발하는 관료들의 개혁요구를 수용해야 했으며, 원나라의 영향력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충목왕 초기부터 성리학이 사상적으로 크게 보급됨으
왕(忠烈王)은 재위 중(王24년, 1298) 원의 압력으로 아들인 충선왕(忠宣王)에게 전위(傳位)했으나 7개월 후에 원은 충선왕을 퇴위시키고 충렬왕을 재즉위(再卽位)케 했다. 10년이 지나 충렬왕이 죽자 그동안 원도(元都)에 불려가 있던 충선왕이 다시 즉위하였다. 그 후에 충숙왕(忠肅王)과 충혜왕(忠惠王)의
왕들은 세자 때 원에 머무르면서 혹은 원 황실로부터 왕위에 책봉 받고 나서 원 황실의 공주들과 결혼을 함
25대 충렬왕, 26대 충선왕, 27대 충숙왕, 28대 충혜왕, 31대 공민왕
원 세조의 딸 홀도로게리미실(제국대장공주)이 충렬왕에게 처음 시집간 이래, 총 7명의 원 황실 공주가 고려왕과 혼인
원 황실
왕들은 원에 의해 지명되었는데 그 결과 고려의 왕권은 대단히 취약하고 불안정해졌다. 잠재적인 왕권 경쟁자들은 원의 중앙정부를 움직이기 위해 노력했으며, 야심가들은 그 주위에 결집하여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쉬지 않고 음모를 꾸몄다. 음모가 너무 치열했으므로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 충혜왕
왕 카말라의 딸인 보탑실련 공주와 결혼했다.
-충숙왕과 원나라 역련진팔라 공주, 금동공주, 백안홀 공주의 결혼
충숙왕의 부인들은 모두 불행한 삶을 살았다. 첫 부인은 충숙왕에게 맞아 사망했고, 두 번째 부인은 아이를 낳다가 사망했다. 세 번째 부인은 충숙왕의 아들인 충혜왕에게 겁탈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