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해 한용운의 생애와 사상
만해는 1879년 8월 29일(양력) 충남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에서 한응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청주, 어머니는 온양 방씨다. 만해의 할아버지 영우는 훈율원 첨사, 증조 광후는 지중추부사를 역임한 사족 계급 출신이었다. 어비지 응준은 충훈부 도사를 지냈으나 만해
충훈부 도사(무과)를 지낸 것으로 되어 있고, 양호 도순무사가 갑오년(1894)에 내린 전령에는 한응준이 농민군을 토벌한 것으로 적혀 있다(만해사상연구소 발표, 1982. 3. 2. 서울신문 참조).
과 어머니 방(方)씨 사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6세 때부터 18세까지 향리의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하였고, 14세에
충훈부 도사(무과)를 지낸 것으로 되어 있고, 양호 도순무사가 갑오년(1894)에 내린 전령에는 한응준이 농민군을 토벌한 것으로 적혀 있다(만해사상연구소 발표, 1982. 3. 2. 서울신문 참조).
과 어머니 방(方)씨 사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6세 때부터 18세까지 향리의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하였고, 14세에
충훈부는 공신 자손 중에서 이임을 맡을 만한 사람을 추천하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만약 추천 받은 사람에게 문제가 있으면 연좌법에 의하여 추천자도 함께 처벌받게 되어 있었다. 추천 받은 사람은 이조나 병조에서 실시하는 시험에 합격해야 하는데 이미 6품 이상을 지낸 현관이 아니면 사서오경중 1
충훈부라는 관청을 두어 국가를 위해 공훈을 세운 사람을 예우하였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 근대적 의미의 보훈의 유래는 지난 1950년대 이후부터 6․25전쟁과 관련한 전․공상군경을 대상으로 한 물질적 지원 위주의 원호사업에서 그 편린을 발견할 수 있는데, 체계적인 한국의 보훈제도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