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의 실패는 이데올로기, 정치, 사회, 학문, 문화등 사회 곳곳에 도사린 일제의 더러운 찌꺼기의 청산도 불가능하게 하였다. 친일파 그들은 지금 어디에 1960년 4월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은 몰락하였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의 붕괴는 곧바로 친일파의 몰락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친일파가 미군정 이후,
친일파청산이라는 문제만을 둘러싸고 논의가 형성되어온 것은 이로 말미암은 것이다.
이 발표에서는 ‘반민특위와 친일파청산’을 주제로 반민특위를 중심으로 한 해방후 일제잔재 청산 시도의 역사를 살펴보고, 반민법의 변화 과정과 그 논쟁을 짚어 본 후 현재의 친일파처단 담론에 대해 생각
및 전비조성을 위해 노력한다. 1924년에는 임시정부의 국무총리 노백린이 사임하자 내무총장과 국무총리 대리를 겸임하게 된다. 1926년 12월 14일 임시정부 국무령에 취임한다. 이 때 김구는 윤기섭, 오영선, 이규홍 등으로 신 내각을 조직한 후 헌법개정안을 의정원에 제출하여 국무령제를 집단지도체제
해방 전야의 시기를 통해 광복을 이루기 위한 우리민족의 좌우 독립운동총체를 살펴볼 수 있으며, 해방이후 정국의 모습에 관한 이해를 도울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김구, 조선건국동맹의 여운형, 미국에서의 외교활동 중심의 이승만과 유격대 활동의 김일성과 통일전선운동
후 만주, 연해주, 미국 등으로 이동한 독립군은 러시아 혁명을 통해 물적 원조를 받을 수 있었고 또 꾸준히 독립투사들을 키워냈다. 물론 국내에서도 비밀 결사들의 활동도 있었기에 1920년 홍범도의 봉오동 전투와 김좌진의 청산리 대첩을 시작으로 독립투쟁사의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낼 수 있었던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