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트는, 스위스 연방의 다른 주들이 언제나 다소간 그 권위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행정수도 베른에서 성장하였다. 그런데 그에게는 이 도시의 느리고 답답한 특성이 결코 없었다. 오히려 그는 외교적 전권이 잘못 행사되는 것을, 즉 사상과 표현의 자유에 대해 어떠한 제한도 용납하지 않는 그들이
칼바르트의 신정통주의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자.
◈칼바르트의 생애 및 저서
칼바르트는 스위스 바젤에서 1886년 5월 10일 신학교 교수인 아버지 프란츠 바르트와 어머니 애나 사토리우스 사이에 태어났다. 그는 그의 담임목사였던 로버트 에스키바허의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순수한 열정을 계기
칼바르트의 사상이 바로 아우구스티누스의 연구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이 얼마나 가톨릭의 기본을 형성하고 있는지 알게 해주는 사실이다. 이러한 점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대와 중세를 넘어 근세에 까지 그 영향력을 주고 있음을 알수 있다. 따라서 아우구스티누스
판단을 내린다 할지라도, 슐라이에르마허는 우리가 항상 신학적 입장을 확인해야 할 몇 안되는 기독교 사상의 거장들, 즉 어거스틴, 아퀴나스, 루터 그리고 칼빈의 대열에 속한다" 고 주장했다. 반면, 신정통주의자들은 슐라이에르마러가 루터와 칼빈으로 소급되는 상속선을 파괴했다고 비판했다.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있는 무한한 질적 차이가 그의 대 주제(主題)였다. 바르트는 초자연적 그리스도 뒤에 있을 역사적 예수를 찾으려 했다. 바르트가 이렇게 한 목적은 자유주의를 신학연구에서 추방하는 것이었으나 결과는 기독교를 역사상의 제 위치에서 떨어뜨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