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바는 에스파냐와 아메리카대륙을 잇는 교통의 요지에 있었기 때문에 스페인은 신대륙 경영의 기지로 삼으려고 했다. 이때 스페인의 가혹한 탄압통치에 맞선 원주민의 반란이 거세지기 시작하면서, 미국이 쿠바로 눈을 돌렸다. 콜럼버스 이후 450년이 지난 이래, 일년간 쿠바에 대한 집중적 연구를 시
미국으로의 이민 때문에 개인농장의 주민수가 크게 감소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급진적인 바스크 분리주의 단체로서 바스크어로 '바스크의 조국과 자유'라는 뜻의 “ETA”(Euzkadi Ta Azkatasuna)의 테러 활동으로 바스크 지방분권주의가 스페인 정권을 약화시키는 가장 큰 세력이 되었다. 자치정부를 갖춘
바티스타가 쿠데타로 또다시 정권을 장악하고 헌법의 정지를 선언했다. 그리고 이당시의 쿠바인의 상황은 미국 자본에 결탁한 지주와 수출 부르주아지를 제외하고는 인구의 90%이상인 민중은 집도 제대로 없고 일거리도 없고 먹을 것도 제대로 없는 비참한 생활에 놓이게 되었다. 즉 독재체제와 미국
쿠바혁명은 라틴 아메리카의 많은 지식인들을 자극하는 일이었다. 중남미 좌파는 앞서 아르벤즈와 뒤에 아옌데의 예를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점진적이고 개량주의적 노선을 견지했다. 그들은 혁명의 가능성을 믿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서구의 사회민주주의를 자신들의 모델로 삼았고, 라틴 아메리
혁명의 상징이 된 것은 쿠바대혁명에서였다. 게릴라들이 시가 를 애호했고, 특히 체 게바라와 피델카스트로는 시가의 혁명적 이미지를 부활시켰다. 부 의 상징이었던 시가가 혁명가의 상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쿠바였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이는 쿠바가 스페인 식민지 국가 중 담배의 주산지였